본문 바로가기

<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해병대 출신 명사들의 격려인터뷰


해병대 출신 명사들의 격려인터뷰

‘우리는 믿는다! 자랑스런 해병의 힘!’


해병대 62년 역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비극으로 기록될 총기사건이 벌어지자, 원인에 대한 규명부터 해결책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무수한 논쟁의 핵심은 전우애가 생명이며, 힘의 원천인 해병대에서 어떻게 전우를 위해하는 일이 벌어졌냐는 것이었다. 해병대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래도 해병대를 믿는다. 강한 군대 해병대가 거둔 빛나는 전공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 출신 예비역들도 이번 사건으로 해병대가 위축되지 않을까 누구보다 걱정이 많은데, 인터뷰를 통해 해병들을 격려하는 ‘힘나는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해병대 출신 명사 인터뷰Ⅰ



‘나라 지키는 그대들이 진정한 슈퍼맨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정병국 장관

깔끔한 외모와 뿔테 안경 속에 빛나는 눈매가 인상적인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별명은 ‘슈퍼맨’이다. 슈퍼맨처럼 어떤 문제도 시원스레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인데, 어떤 악조건도 극복하며 임무를 완수해내는 해병대를 연상시킨다. 그렇다. 정 장관은 바로 해병대 416기 출신이다.
정 장관은 올해 신년 벽두에 연평도를 찾아 1박2일 경계근무를 섰으며, 지난 8월 3일에는 해병대 제1사단을 방문해 '지식강군, 병영독서 훈련으로부터'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해병대, 아니 대한민국 군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정 장관은 2004년 ‘도서관법’ 개정을 주도해 병영도서관이 대대 단위까지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정 장관은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기왕에 군생활을 한다면 가장 군기가 세고 혹독하다는 해병대가 제 자신을 갈고 닦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며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해병대 입대는 정말 잘했다”고 믿는다.
해병대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헌병으로 복무한 정 장관은 “군대시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되 돌이켜 본다면, 흰 눈과 어둠이 교차하는 초소에서 칼바람 맞으며 근무를 서고 돌아와 잠시나마 책을 읽던 순간”이었다며, “그 때의 경험과 기억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의정활동 중 병영도서관 활성화에 힘을 기울이게 만들었고, 장관 취임 이후에도 국방부와 함께 ‘책과 문화가 있는 병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군  경험이 병영문화 개선에 관심과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 장관에게 해병대만의 특별한 문화는 무엇이냐고 묻자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군기도 세고 전우애도 각별한 곳이 해병대입니다. 또, 해병대하면 ‘강한 군대’, ‘싸우면 이기는 군대’ 라는 인식이 국민들에게도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해병대만의 독특한 전통과 병영문화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러나 해병대의 병영문화에 대한 변화요구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좋은 전통과 문화는 이어 나가고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발전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좋은 전통은 계승 발전시키고, 그릇된 것은 과감하게 떨쳐버리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의 기로라는 것이다.
해병대 출신의 긍지가 남다른 정 장관은 “군대는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대한민국 남자의 의무”라며 “이를 악물고 고된 훈련을 받고 힘들게 복무생활을 하면서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을 함께 했던 전우들과 울고 웃었던 해병대 복무기간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소중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강인한 해병정신이 인생의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해병대의 시련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있는 정 장관은 해병대는 반드시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롭게 거듭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애정어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군 복무 2년은 소모적으로 흘려 보내는 시기가 아니라 자기계발을 기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또 다른 자신을 담금질할 수 있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라고 생각합니다. 병사들이 훈련과 근무 외의 주어진 시간에 자기학습, 교양증진, 동호회 활동 등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가꾸어 나가고,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소중한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지를 발행하고 있는 (사)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이사이기도 한 정 장관은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1600 곳의 병영도서관을 대상으로 내년부터 50개 시범부대에 도서관 리모델링 비용으로 각각 5천만원씩을 지원할 계획이다. 현재 병영도서관의 1/3이 컨테이너나 창고 등을 개조해 만든 열악한 시설이다.
또한 병영에 필요한 우수도서 8만여 권을 제공하고, 지역 대표 도서관과 연계한 독서프로그램도 실시할 계획이다. 군 장병들이 준비된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문화부의 계획은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가 실무를 주관하게 된다. ■취재 / 홍민석 편집위원



해병대 명사 인터뷰Ⅱ



‘진흙땅을 구르던 투지가 해병의 힘이다’

인천 유나이티드 FC 허정무 감독

2010년,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며 온 국민에 기쁨을 안겨준 허정무 감독. 인천 유나이티드 FC에 새 둥지를 틀고 따뜻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끄는 그는 해병대 357기다.
1978년, 잘 나가는 스타선수였던 허 감독은 ‘멋있어서’ 해병대를 선택했다. 당시 해병대 축구단 감독을 맡고 있던 박세혁 감독의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이왕 다녀올 군대라면 남자다운 해병대가 제격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허 감독에게 군대는 축구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나’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 그렇기에 무엇보다 소통과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이 허 감독의 생각이다. 유난히 고되기로 소문난 해병대 훈련. 허 감독은 “개인의 정신력도 중요하겠지만,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팀워크 없이는 힘든 훈련을 견뎌내기가 어렵다”고 조언한다. 군 생활의 기본은 상명하복이지만 그 근간에는 소통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즐기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군 생활에 임했다는 허 감독. 그는 “즐기는 마음으로 자신감을 갖고 상대를 먼저 배려하면 누구보다 의미있는 군 생활을 보낼 수 있다”고 강조하며 옛 추억을 되새겼다.
그가 해병대 축구단에 있을 때만 해도 육해공 삼군에 모두 축구단이 있는데, 라이벌 의식으로 전력의 편차가 있었음에도 물고물리는 박빙의 승부를 연출했다. 그 중 조광래, 박창선, 이강조, 최종덕, 박성화 선수가 포진한 육군의 충의팀은 그야말로 최정예팀이었다.
당시 가장 큰 대회는 인도네시아 알할린컵 진출권이 주어지는 대통령배선수권대회였다. 해병대(해군)팀의 경기 상대는 육군팀.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장은 잔디가 아닌 흙바닥에, 비까지 온 터라 진흙투성이였다.
그러나 해병대의 투지는 남달랐다. 해병대팀은 예상을 뒤엎고 육군팀에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허 감독은 “우리 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해병정신이 아니었나 싶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사회생활이든 군생활이든 축구든, 객관적인 전력보다는 정신력이 승패를 가른다고 믿는다. 당시 부장이었던 우영목 소령에게서 “너야말로 수륙양용 해병대”라는 칭찬을 들었을 때 밀려든 해병으로서의 자부심, 그 날의 전우애는 여전히 허 감독의 몸과 마음에 생생히 살아 있다. “해병대 출신이라면 모르는 사람도 관심이 가고 금방 친해진다”는 허 감독은 해병대 출신 구단직원들에게도 선배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허 감독이 해병대를 통해 얻은 것은 인연만이 아니다. 군 시절 생겨난 자신감과 끈기는 선수생활에서나 지도자 생활에서 그의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모두가 만류하던 월드컵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을 때나 기업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시민구단의 감독직을 수락할 때도 마찬가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해병대 정신이 그를 움직였다.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데, 해병은 그런 면에서 한발 앞서있다”고 말하는 허 감독. 그에게서 여전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끝으로 해병대 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응원의 메시지를 부탁하자 “우리나라의 안보의 선봉에는 늘 해병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늘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건강하고 강건한 해병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취재 / 유희종 기자



해병대 명사 인터뷰 Ⅲ



“‘해병대 출신’ 꼬리표는 가슴에 길이 남을 태극기”

배우 최필립

‘배용준을 닮은 배우’로 한동안 유명세를 떨쳤던 배우 최필립. 사람들은 그가 닮은꼴 배우라는 이유 하나로 그 역시 부드러운 남자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그는 해병대(903기)에서 조교로 늠름하게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쳤다. 입대 전 무용을 전공했던 그가 굳이 해병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용 콩쿨에서 입상을 하면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군 면제’를 아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회 입상’보다 ‘군 면제’를 더 바랐다면, 아마 전 제 자신을 비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당히 군에 입대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해병대’를 선택했습니다. 강인한 남자를 표방하는 곳이니까요.”
그렇게 최필립은 ‘최필순’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빨간 명찰을 달고 자랑스럽게 병역이행을 다했다.
전역한지 9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는 해병대에 감사함을 느낀다. 자신의 꿈인 ‘배우’가 될 수 있도록 가장 커다란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역 후 배우 오디션을 숱하게 보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때 마침 해병대 1000기가 입소하는 장면이 나왔다. 해병대에 입대한 후배들의 모습을 보다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게 된다.
“후임들은 해병대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해병대에 입소했는데, ‘해병대 정신을 물려받은 나는 정작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더군요.”
그는 이번에는 오디션 현장 대신, 드라마 감독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고는 “출연을 시켜 달라”고 막무가내로 통사정을 했다. 그때 감독의 표정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하지만 그는 해병대 정신, ‘안 되면 될 때까지’ 라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후,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신에게 바짓가랑이를 잡혔던 감독으로부터 드라마 출연 제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데뷔작 MBC 드라마 <영재의 전성시대>다.
해병대 정신으로 배우의 자리에 오른 그. 이번에는 추억의 병영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이병 때, 육?해?공군이 모두 참여하는 3군 노래자랑에서 해병대 대표로 선임들과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병사들의 박수 갈채를 가장 많이 받아 ‘해병대 인기상’을 받았습니다. 포상휴가를 받은 저는 첫 휴가 날짜와 합해 총 14박 15일의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야말로 이병에게는 꿈만 같은 시간이었죠.”
너털웃음을 지으며 추억을 곱씹는 그에게 ‘군대’의 의미를 물었다. “지금도 가끔 군 생활을 하는 꿈을 꾼다”며, “병영체험이라도 해 보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최필립에게 군대는 생애 꼭 한 번 가볼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그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는 시각이 금세 달라진다고 한다. 그때서야 감춰진 그의 마초적인 성향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해병대 출신’이라는 꼬리표 하나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뿌듯해한다. 마치 가슴 속에 길이 남을 태극기와 같다고.
해병대를 위한 일이라면 자진해서 적극 앞장서고 있는 그는 “해병대에 입대하는 모든 남자들은 진짜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청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입니다. 힘내십시오!”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취재 / 박현주 기자


해병대 명사 인터뷰 Ⅳ



‘나’를 변화시켜 준 무적해병의 자부심
포항스틸러스 김원일

포항 스틸러스의 ’해병대 스타’ 김원일. 등 번호 13번인 그가 경기에 나서는 날이면 관중석에는 빨간 명찰과 팔각모가 물결을 이룬다. 경기가 끝나면 김 선수는 관중석을 향해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를 하고, 그를 지켜보는 해병대는 우레같은 함성으로 답한다. 포항 스틸러스의 경기에서만 볼 수 있는 명장면이다. 해병대 출신인 김 선수는 물론 포항스틸러스의 다른 선수들도 열화와 같은 응원에 큰 힘을 얻는다.
지켜보는 후임들 때문에라도 김 선수는 온 힘을 다해 필드를 뛴다. “후임들 앞에서 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한 발짝 더 뛰게 된다”는 그는, 경기를 마치고 경례를 하러 갈 때마다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해병 1037기인 김 선수는 K-리그에서 얼마 되지 않는 '막군' 출신이다. 막군이란 상무나 경찰청 등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병사가 아닌 일반 병사를 일컫는 축구계 은어다. 숭실대 재학 중 입대,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에 배치된 김 선수는 군복무를 하면서 틈틈이 축구도 했다. 해병대 대표 선수로 나가 군내 축구 대항전인 2008년 군대스리가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자부심 있는 군 생활을 하고 싶어 해병대에 지원했다는 그는 군 생활의 추억으로 IBS 기초 훈련과 KCTC과학화훈련을 꼽는다. 훈련을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해병대를 대표해서 나간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5개월간의 준비 끝에 강원도 인제의 육군과학화훈련단(KTCT) 훈련장에서 실제 전쟁을 한다는 각오로 훈련을 받았다고.
그는 “훈련이 시작되고 정말 이겨야겠다는 마음으로 4시간 동안 산넘고 물건너 적참호에 도달했지만, 도착하기 직전 지뢰를 밟아 죽고 말았다”며 아쉬움을 비쳤다. 고된 훈련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줄 아는 김 선수야말로 진정한 사나이가 아닐까.
지금도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무적해병’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과 같은 해병대 구호가 맴돈다.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김 선수의 모습은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대한민국 해병의 힘을 보여주는 듯 하다.
김 선수가 군생활을 통해 키운 것은 정신력과 전우애만이 아니다. 군대는 가족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고. 그는 “사회와는 많이 다른 군 생활을 겪으면서 부모님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며 “지금은 항상 효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김 선수의 해병대 생활이 이토록 값진 시간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변화하려는 의지와 해병으로서의 긍지 덕분이다. “항상 문제는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나에게서 문제를 찾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태도로 군 생활에 임했던 것.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바꾸고자 하는 자세는 자부심과 긍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김 선수 역시 “자부심만 있다면 힘든 군생활도 이겨낼 수 있다”고 조언한다. ■ 취재 / 조상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