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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내 인생의 멘토]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하는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


“힘내세요! 여러분  뒤에 나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국세청 개청과 함께 공직생활을 시작해 대전국세청장까지 38년을 국세청에서 몸담은 세무공무원. 2004년 공직생활 마감 후에는 한국세무사회장 연임. 그가 가진 이미지에는, 어쩌면 정확하기만 할 뿐 피가 흐르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세리(稅吏)’란 선입견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삶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살아온 사회생활의 보폭만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온 그는, 지난해 말부터는 천안함재단의 이사장으로 아픔을 보듬고 비전을 제시하는,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취재/ 유성욱 기자 
사진/ 권윤성(A&A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서초동 세무법인 석성의 회장실,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과의 인터뷰중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 통화 분위기가 잠시 떨어져 있는 아들과의 대화처럼 정겹다.
“그래 임마! 이제 방학 했잖아? 사무실로 한 번 나오라고. 사무실 옥상 시원하게 해놨으니, 삼겹살 한 번 구워 먹자구. 다들 잘 있구. 그래 다 같이 한 번 모이자!”
통화가 끝나자 “굉장히 반갑게 통화하던데 누구냐?”고 물었다. 최광수 예비역 병장이라고 한다. 천안함 폭침 당시 승조원 104명 중 모두 58명의 장병이 구조됐는데,  그 중 수병이 15명으로 현재 11명이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최광수 예비역 병장도 현재 고향 경주에서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생존자 중 한 명이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 오전 9시 22분,  당시 최광수 병장은 당직근무 중이었다. 그때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배가 기울자, 최 병장은 암흑천지 상황에서 기울어진 갑판에 올라가 함장실에 갇힌 선장에 이어 선실에 갇힌 동료를 닥치는 대로 구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배는 빠르게 가라앉았고, 필사의 노력 끝에 탈진한 그는 함장과 함께 맨 마지막으로 해경 구조선에 구조됐다.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 이후 그는 눈만 감으면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이른바 일종의 정신장애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다. 이처럼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은 물론, 동료를 눈앞에서 놓친 천안함 생존자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보다 훨씬 커 이들에 대한 전문적인 상담치료가 필요하다는 게 한결같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천안함재단은 4가지 미션이 있다!”

조용근 이사장은 그런 최광수 예비역 병장을 아들처럼 대한다. 그 역시 이사장을 아버지처럼 생각한다. 며칠 있으면, 전역한 11명의 생존 수병들이 조용근 이사장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할 모양이다. 
“천안함 재단은 네 가지 미션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천안함 순국 46용사 및 한주호 중위 등 사망자 유족에 대한 복지대책입니다. 이를 위해 국민성금 395억 원 중 유가족당 5억 원씩 모두 250억 원을 사용했습니다. 두 번째는 생존 장병에 대한 정착 프로그램 운영입니다. 그들은 절대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1월 21일 생존 장병 58명을 해군회관에 초청해 1인당 500만원의 격려금을 드렸습니다. 또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일대일 멘토 결성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해군의 복지와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사업입니다. 해군의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국민의 안보의식 고취입니다. 다시는 천안함 침몰과 같은 일이 일어나선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보의식을 다져야 하는데, 정기적으로 분단된 조국의 실상을 보여주는 안보체험이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눔의 원칙 5가지를 말한다”

조용근 이사장은 1966년 국세청 개청과 함께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대전지방청장직을 마지막으로 2004년 퇴직했다. 인생의 38년을 국세청에 몸담은 최고의 세무전문가, 게다가 국세청 고위직은 대개 퇴직후 로펌을 택하지만, 그는 전공을 살려 세무법인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천안함 침몰 이후 모아진 국민성금을 바탕으로 탄생한 재단의 이사장을 맡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자금을 관리하는 실무관계나 법령에 대해서는 따라올 이 없겠지만, 비록 무보수라 할지라도 천안함 재단의 이사장의 가슴이 차갑기만 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조용근 이사장이 어떻게 천안함재단의 이사장이란 의미있는 직책을 맡았을까 하는 의문은, 그가 일하는 세무법인 현관문을 열리면서부터 바로 풀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방문객을 맞는 사인물이 눈에 띈다. ‘나눔과 섬김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라는 문구다.
의문을 푸는 단서 또 하나는 그의 집무실에 놓인 낡은 철제 저금통이다. 35년 동안 그는 그 저금통을 가득 채워 가까운 주변을 도왔다. 지금도 출근과 함께 매일 1만원씩은 출근부에 도장 찍듯 넣는다. 한 달에 30만원을 모으면, 구청에 연락해 소년소녀 가장 3명의 계좌를 물었다. 요즘에는 동남아 불우한 이들의 언청이 수술 지원 프로그램에 후원한다.
오래된 저금통보다 훨씬 더 큰 기부사업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이 펼치면서도, 어찌 보면 소소하기까지 한 그 일을 35년 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상징하는 바가 아주 크다. 
“제가 권하는 나눔의 원칙 5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지금부터 하라’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기부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여기서부터 하라’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장소가 지나면 마음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부터 하라’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넷째 ‘실천 가능한 것부터 하라’입니다. 사업이 잘되면 하겠다는 것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면 기부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섯째 ‘작은 것부터 하라’입니다. 원래 기부는 작고 사소한 것부터 출발하니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말하자면,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35년 된 저금통은 내게 의미가 큽니다.”
조용근 이사장은 다일공동체 밥퍼 명예본부장으로, 사랑과나눔재단 감사로, 샘물 호스피스 자문위원으로, 신한지주그룹 이희건 장학회 감사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 활동으로 2006년 자랑스런 한국인대상을 포함해 대통령 포창과 훈장을 비롯, 수많은 상을 받으며 나눔과 섬김의 전도사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소중한 나눔활동 한 가지는 석성장학회다. 지금은 작고해 세상에 없는 아버지 조석규, 어머니 강성이씨는 어려운 시대 상황 속 배우지 못한 설움에서도 식솔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들에게 받은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그 사랑을 잊지 못한다.
서울국세청 조사관리계장으로 있던 1994년 조용근 이사장은 부모님의 이름 한 자씩을 따서 ‘석성장학회’를 만든다. 자신이 운영하는 석성 세무법인의 매출액 1%를 기부하며, 석성장학회는 지금까지 한해 160명씩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달한 장학금만도 12억 원에 달한다고.
올해는 새로 설립한 ‘석성 일만사항회’에도 힘쏟고 있다. 1만 명의 기부자가 한 달에 1만 원씩 모아 중증 장애우의 지도자 양성 교육, 생활비, 치료비, 복지용구 구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1만명이 어떻게 모일까 모두가 의아해 했지만, 그래도 매달 1천만 원이 넘는 돈이 모이고 있다고.
천안함재단 이사장을 맡게 된 계기도 그 바탕에서 비롯됐다. 한국세무사회 회장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해 KBS에 성금을 내러 갔다. 그때 KBS 사장이 말했다. 성금이 모이면 합리적 배분이 필요할 테니, 그 임무에 딱 맞는 적임자로서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 코 묻은 돈까지 보태진 성금이었다. 그는 철저히 그 성금을 허투루 사용함이 없이 봉사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천안함재단 이사장,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적임자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군대 안 간 사람, 사고의 틀이 갇혀 있더라”

이제 얼핏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조용근 이사장,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난은 부끄럽지도 않은 일이라지만, 자랑스럽지도 않다. 구구절절 어려웠던 이야기는 모두 차치하고 한 가지 일화로 대신하자.
그에겐 ‘쥐고기’를 50마리를 먹으며 겨우 삶을 영위했던 시절이 있었다. 군것질로 먹는 ‘쥐포’가 아니었다. 부친이 가족의 앞날을 위해 밀항선을 탔던 시절, 생계를 홀로 짊어진 어머니는 친정으로 내려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모두 4남매, 형과 누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끼니를 연명했지만, 다섯 살 그와 두 살 터울의 동생은 영양실조에 걸려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어디서 고기를 가져왔다. 동생은 그 고기를 소화 시키지 못했다. 얼마 후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조 이사장만 당시 정체불명의 고기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나중에 그 고기가 쥐고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인생을 옥죈 가난은 국세정 개청요원을 뽑은 공채에 합격하며 탈출구가 마련된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진학은 포기했던 상태였다. 그는 공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경야독의 삶을 이어간다. 그런데 어느날 군대에 가게 됐다.
“참 고민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가 일하던 국세청 간부의 3분의 1이 군대에 안 갔더군요. 저도 생계를 책임진 입장이라 고민을 많이 했지만 꾀를 부릴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에야 그게 제가 자신 있게 삶을 살고, 성공인생을 거둘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지만요.”
1970년 4월 20일 논산훈련소로 갔다. 어찌하다 김해공병학교로 가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안양에 있는 야전공병단에서 군대 생활을 하게 된다.
“입대 고민을 한 죄과를 독톡히 받았습니다. 청와대를 향해 침투한 김신조 사건이 터지며, 6개월을 더 복무해야 했으니까요.”
전역과 함께 다시 국세청에서 일했다. 간부 직급에 오르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군대 빠진 사람들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며, 조직에 영 도움이 안됐다. 그래서 더욱 군대는 꼭 다녀와야 하는 곳이란 확신을 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고.
조용근 이사장은 지금도 군대에서 땀 흘리는 장병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한다. 비록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며 혹시 갈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꾸나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
“남을 원망하거나 화낼 일이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 그랬구나’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군요’라는 ‘~구나’와 ‘~군요’란 화법과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면, 타인과의 갈등도 술술 넘어가고 서로 공감하는 공존의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그는 죽음을 넘나들 정도의 가난을 겪었지만, 심각하게 갈등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퍼튜니티 이즈 노웨어(Opportunity is nowhere)’란 말을 직역하면 ‘기회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 되지만, 단어 하나만 띄어 쓰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것.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어디에도 없는(nowhere)’이, ‘지금 여기(now here)’로 바뀌게도 된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이 현실을 기회로 살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