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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내 인생의 멘토] 김영 회장 "도전=성공도 아니지만, 실패한 도전이란 없다"


내 인생의 멘토


성공과 좌절 반복하며 편입학원계의 전설이 된 김영 회장

 

“‘도전=성공’도 아니지만, ‘실패한 도전’이란 없다”


지난 35년 동안 편입학 교육시장의 절대지존으로 군림해온 김영편입학원을 일군 김영(본명 김영택) 회장은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다 마침내 성공을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연매출 500억원, 전국에 모두 27개의 학원(직영 18개, 프랜차이즈 9개)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삶을 ‘교훈적 인생’이라기보다는 ‘드라마틱 인생’이라 표현한다. 순탄치 않았던 그의 인생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의욕과 도전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아직도 자신의 삶이 힘겹고 때로 무의미하다고 느껴진다면, 이 멘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취재/ 유성욱 기자  사진/ 최윤호(포토그래퍼)


 

전설로 남은 ‘김영 신화’의 탄생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인 1978년 1월 고려대학교 교정. 쌀쌀한 날씨에도 운동장은 꽤 북적였다. 편입생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두근거림 속에 합격자 명단이 게시됐다. 여기저기서 환성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좀 지나자 30여명의 합격생들이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형뻘 되는 한 학생을 헹가래 치기 시작했다. 뜻밖의 광경에 주변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이길래 저렇게 열광적인 환대를 받는 걸까? 그리고 자초지종을 듣고나자, 모두가 그를 다시 보게 됐다. 헹가레의 주인공은 바로 고려대 교육학과 1학년 김영이었다.


그해 대학신입생 김영은 자신이 가르치던 편입 준비생 40명 중 무려 34명을 합격시켰다. 합격자 경쟁률이 40대 1이나 되었던 시험이었던 걸 감안하면, 기적과 같은 성과를 일군 셈이다. 이후 김영은 편입학 학원가에서 절대 지존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1년 5월, 김영 회장이 이끄는
㈜아이비김영은 연 매출 500억원에 이르는 교육전문그룹으로 성장했다. 아이비김영은 지난 35년간 매년 최다 합격자수를 배출하고 있는 김영편입학원을 비롯해 미대 편입학원‘창조’, 의치약대 입시 전문학원인‘김영PMS’, 온라인강좌와 출판을 담당하는‘IB김영’을 거느리고, 월간 편입뉴스를 발행한다.


현재 직영 18곳, 프랜차이즈 9곳 모두 27개 학원에 등록된 수강생만 해도 1만여명, 상위권 대학 편입생 10명 중 7명은 김영편입학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교육전문그룹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해가고 있는 아이비김영의 현주소를 알려준다.

자, 이쯤이면 주변에서 매스컴에서 가끔 접할 수 있는, 어느 잘 나가는 명사의 인생이야기로 단정지을 수도 있겠다. 좋은 환경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비상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아주 운이 좋아 성공가도를 달려온, 부럽지만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쯤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누구보다 힘겨운 지난 날을 보냈고, 쓰라린 실패도 숱하게 맛보았다. 그가 달랐던 것은 꿈을 갖고 오뚜기처럼 끊임 없이 도전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세상을 헤쳐갈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중졸 행정병, 군대에서 인생이 바뀌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영 회장의 어린 시절은 험난하기만 했다. 사실 처음부터 불우했던 건 아니다. 부친은 꽤 규모가 있는 회사를 운영했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원자재를 싣고 제주로 오던 배가 침몰하며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게다가 김회장이 중학생이었을 무렵, 부친이 세상을 떠나며 집안은 더욱 곤궁해진다.


그 무렵 궁핍한 집안에서는 그를 야간고에 보내며, 점원으로 일하게끔 할 계획이었다. 우연히 그 소식을 듣게 된 그는 무작정 상경을 감행한다.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도시에서 혼자 생존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조금씩 돈을 모았다는 이유로 김회장은 ‘무작정’이 아니라 ‘유작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무작정이든 유작정이든 중학교를 갓 졸업한 그가 혼자서 삶을 헤쳐가는 일은 애초부터 만만치 않았다. 우선 독서실을 끊어 급한대로 숙소를 마련했지만, 얼마간 있는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끝장이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가 꿈꾸던 공부는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살기 위해, 돈 버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뛰어들어야 했다.


“길 바닥 책장사부터 정말로 별거별거 다해봤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수완이 있었나 봅니다. 나름대로 돈을 좀 만지며, 최소한 굶지는 않았으니까요. 대신 공부는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중졸 출신으로 군대에 가야 했죠.”


군 생활은 김영 회장의 삶에  분깃점이 된다. 그는 1사단 포병단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다. 대학 출신이 즐비한 그곳에서 중졸 행정병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군 생활중에도 고참이 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으려 노력했다. 물론 그러다보니 무시와 멸시가 왕따로 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비로소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 왔다.


“상급부대에서 검열을 하는데, 예측 못한 질문에 모두가 쩔쩔 매는 겁니다. 비록 졸병 주제였지만, 당시 내가 검열단장이라면 무엇을 지적할까 고민하며 나름대로 브리핑 자료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런데 예측 문제로 찍어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차트로 브리핑을 하게 됐는데, 검열단장의 눈이 휘둥그레 해지더라구요. 덕분에 부대장에게 칭찬을 받게 되며, 대학 출신들 하고 비교해도 제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 일로 자신감은 얻게 됐지만, 역시 중졸 학력으로서는 안되겠다는 결심도 들었다. 군 생활의 절반이 지날 무렵이었다. 김회장은 큰 꿈을 위해 제주를 떠났던 그 결심을 떠올렸다. 그리고 군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군대에서 그가 한 공부는 얼핏 무모해 보인다. 매일 사전 두장씩 찢어 모두 외워버리는 식이었다. 화학주기율표나 훈민정음 등 암기 위주로 틈만 나면 달달 외우고 다녔다. 무모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김영 회장은 군대 시절 외운 것만큼 안 잊혀지는 게 없다며, 인터뷰 중 훈민정음을 달달 읊어 나간다.


군대 제대한 이듬해 그는 대입 자격 검정고시와 고려대학교 동시에 합격한다. 그 원동력을 지금까지 그는 바로 ‘군대 생활’이라 말한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쉼 없이 도전!


1977년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지만, 끊임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던 중 영문과 조교로부터 제안이 들어온다. 종로에 있는 모학원에서 고려대 편입지원생 대상 영어강사를 구하는데, 한번 맡아볼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아마도 영어 공부에 취미가 있어 타임반 등 동아리 활동을 통해 발표하는 모습을  조교가 기억한 것 같았다. 육체노동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판인데, 자신의 공부도 겸할 수 있으니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첫 데뷔 무대는 참담한 실패를 거둔다. 앞자리에 않은 여학생 때문이었다. 마치 프랑스 인형을 닮은 그 여학생의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강의가 제대로 될리 없었다. 다음 날 학원에 가니 달랑 한 명만 자리에 앉아 있더란 것.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만 곧 실패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니 반성이 밀려왔다. 한 시간 강의를 위해 내가 얼마나 준비했던가? 결국 준비부족이었다.


“지금도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도전은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달쯤 지나 기회가 다시 왔다. 고려대 편입 준비생 40명을 모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엔 철저하게 준비했다. 학원 강의에 드라마 기법을 도입한 것은 당시 획기적이었다. 드라마 식으로 강의 콘티를 짜고, 강의 스타일, 의상, 소품, 심지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유머까지 준비했다. 결과는 대성공. 앞서 말한 40명 중 34명 합격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직접 학원을 차렸다. 자신의 이름에서 부르기 좋게 ‘택’자를 뺀 김영학원이었다. 강의가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수입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400~500만원이던 시절, 한달에 무려 1000만원의 수입을 챙겼다. 그렇게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4년 동안의 꿈만 같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980년 그는 참담한 좌절을 맛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등장하며, 교육 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격적 조치가 연이어 취해졌다. 대학 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 실시, 과외 금지 등이었다. 이어 전국 모든 대학에 대한 편입시험이 금지됐다. 


엄청난 타격이었다. 수험생의 환불 요구에 막대한 시설투자가 고스란히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전의 성공은 다 물거품이었다. 집까지 잡히며, 한마디로 알거지 신세가 됐다.


다시 단칸방 신세가 됐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우연히 접한 게 당시 시작된 콘도미니엄 분양 사업. 김회장은 당시 콘도미니엄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 밑에서 일했다.


입사 첫해부터 김회장은 탁월한 실적을 올렸다. ‘준비된 도전’의 이치를 깨달은 그가 관련자료를 철저하게 독파하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었다.


입사 2년차에는 1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특판사업본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 순간 김철호 회장의 탈세 구속, 명성그룹의 부도로 또 다시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된다.


또 다시 닥치는 대로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김회장은 손 대는 일마다 성과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운명은 매번 어느 정도 성공한 그를 다시 시험에 들게 했다.


김회장은 1987년 졸업정원제 폐지와 함께 다시 학원계로 돌아온다. 이후에도 교육정책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던 것.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개발하라


오직 자신의 능력과 이름만으로 승부를 판가름 해야 하는 학원가는 이름만 대면 기억할 만한 스타들이 즐비하다. 국어의 서한샘, 수학의 홍성대, 영어의 송성문 그리고 이익훈, 민병철, 정철 등이 1970~80년대 학원가를 주름 잡았던 1세대 스타강사들이다.


직접 만든 교재를 통해 더욱 유명세를 얻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워서 학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경영을 하며 경영자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아이비김영 김영 회장도 1977년도에 편입학이라는‘블루오션’을 찾아내고 스타강사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그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회사를 경영해 연 매출 500억원이라는 교육그룹으로 입지를 굳혔다.


김회장이 더욱 높이 평가받는 것은 1세대 스타 강사로서 아직까지 현역 활동을 하는 몇 안 되는 경영자란 점 때문이다.


“한때 제가 천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IQ 검사를 받아보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IQ 109 정도가 나오더라구요. 믿기지 않아 다시 검사를 받았죠. 얼핏 그 정도였어요. 중간 정도의 두뇌라 할 수 있죠.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봤어요. 그랬더니 잘 하는 쪽만 탁월하고, 예를 들어 물리나 화학같은 경우는 완전 젬병이더라구요. 그래서‘지피지기’란 단어를 떠올리며, 간단히 마음 먹었죠.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개발하고 거기에 집중하자.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만약 100년 동안 춤을 배운다 한들, 6개월 배운 제비를 따라가겠냐구요.”


그러한 깨달음이 오늘의 김영 회장을 여전히 현역으로 존재케 하는 배경처럼 보인다.‘도전’이라는 화두 역시 마찬가지다. 도전에는 철저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앞서 강조했지만, 사실‘준비된 도전’이라고 해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이들도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마침내 성공 하나를 거머쥐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꼭 성공에 목매달지 않는다면, 도전 자체가 인생의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면 도전에 실패란 없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예를 들어 편입에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실패는 아닙니다. 편입공부해서 기른 실력은 취직시험에서 발휘될 수도 있고, 사회생활을 하며 두고두고 써먹게 됩니다. 저도 다시 편입학원계로 돌아오기까지 다양한 사회경험을 하며 신산을 겪었습니다. 그 다양한 사회경험이 학원경영에 다 도움이 되더라구요.”




김영편입학원이 수많은 도전 속에서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그러한 유전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비게이터는 서울에서 출발하든, 부산에서 출발하든, 목포에서 출발하든, 당신을 원하는 목표까지 이끌어준다. 사용자에게 필요한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영편입학원의 성가도 마찬가지다. 또 한가지. 무엇보다 도전을 위한 준비라는 기본에 충실하기에, 비록 1차 목표에 실패했더라도 어디에선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을 남게 해준다. 그렇다면 그것은 김영 회장의 말대로 실패한 도전만은 아닌 셈이다.


아무튼 인생을 살며 도전은 멈추어서는 안될 일이다. 제주특별자치도 투자유치자문관으로 활동하는 그는 고향에 꿈꿔온 거대한 관광개발사업의 밑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요즘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