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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독서는 나의 힘] 삼천리 정순원 사장 '21세기 미래사회의 경쟁력은 인문고전에 있다"



경제학 박사이자 국내 최고의 도시가스 기업인 삼천리의 CEO인 정순원 사장의 책 읽기는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정 사장은 독서를 통해 ‘나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처절한 자기투쟁이 뒤따르지 않는 독서는 ‘지식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나며, 그 ‘지혜’는 ‘독서’를 통한 ‘변화’라는 의미다.

취재 / 홍민석 편집위원
사진 / 권윤성 팀장(A&A 스튜디오)


명문고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수재가 있었다. 대통령을 꿈꾸었던 청년은 유신정치에 맞서 최루탄을 마시며 시위현장을 누볐다. 의식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라도 암울한 정치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1970년대 초였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정치에 대한 환멸로 다가왔다. 청년은 정치의 꿈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도전한다.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뱃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불의로 가득했던 세상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막막하고 막막해서 바다에 갔더랬습니다. 짙푸른 바다는 포말로 부서지며 가슴까지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바다만 바라보다가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바다만 걸어두고 나만 혼자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필자의 졸시 「세상에 내가 바다가 되다니」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해군학사장교(OCS : Officer Candidate Class) 63기로 임관한 청년장교는 백령도 앞바다를 지켰다.

“추운 겨울 백령도 앞바다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태양이 떠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저물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어제인지 내일인지 분명치 않은 시간, 그 경계가 너무 아름답게 보였어요.”
청년장교는 나를 버리고, 알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인생에서 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삼천리의 정순원 사장이다.    
‘삼천리 연탄기업사’로 출발한 삼천리는 1980년대 천연가스(LNG)를 공급하는 도시가스사업으로 전환함으로써 제2의 도약을 이룬 굴지의 에너지 분야 전문기업이다. 천연가스를 이용한 도시가스사업을 주력으로 집단에너지, 소형열병합발전, 해외자원개발, 신재생에너지 등 국민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활에너지를 개발·보급하고 있으며, 에너지사업의 다각화와 함께 환경사업 및 외식, 금융 등 비에너지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33개 도시가스 회사 중 16.7%로 가장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도시가스기업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도시가스분야 1위에 8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정 사장은 군 생활에 대해 단체생활을 통해 성격도 바뀌었고, 할 수 있다는 자심감과 체력까지 단련한 ‘긍정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해군에 대한 애정이 깊은 정 사장은 해병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해병대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3년 6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한 정 사장은 삼성그룹과 국제경제연구소를 지원해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이럴 경우 대부분 삼성행을 선택하지만 정 사장은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아 연구소를 선택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 정 사장은 과감하게 미국행을 결정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으로 떠난 유학 생활은 힘들었다. 언어의 장벽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때 수학에 자신이 있는 정 사장은 통계학 수업을 같이 듣던 미국인 친구들과 거래를 했다. 정 사장이 통계학을 가르쳐주는 대신 친구들의 다른 과목 노트를 빌려보는 방식이었다. 힘겨운 학업이었지만 정 사장은 자신을 뒷바라지 하느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내를 위해 이를 악물고 학업에 매진해 석사와 박사과정을 3년만에 끝마칠 수 있었다.
귀국한 정 사장은 현대경제연구소 창설 멤버로 들어가 오랫동안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매달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환율, 유가, 세계 경제의 동향 등을 브리핑하던 정 사장은 정주영이라는 한국경제의 거인과 만나게 된다. 고인이 된 정 회장에 대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달라고 하자, 정 사장은 현대 신화(現代神話)는 정 회장의 통찰력이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브리핑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받아 적는 정 회장님의 메모가 궁금해 한번은 슬쩍 넘겨보았더니, 제가 설명했던 각종 경제동향과 경제 용어가 한자로 꼼꼼하게 적혀있었습니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한 시간까리 경제 브리핑을 메모지 한 장에 정확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정 회장님의 혜안과 통찰력은 물론이고 위대한 경영자는 정말 남다른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결재서류를 정 회장이 간단하게 처리하는 것이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결재 받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 답이 나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결재 사안에 대해 확신에 있으면 얼굴에 자신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정 사장은 현실과 이론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경제 현장은 경제학 박사인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고민을 거쳐 정 사장은 경영자로 변신한다.
경영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정 사장은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정 회장 밑에서 경영자로 일하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정 사장은 한참 뒤인 2003년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사이소 히로시 지음)이라는 책이 출간되자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침을 일찍 시작해 일을 하면 대부분 오전 중에 하루 일과가 끝나게 됩니다. 자연스레 회사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지요.”정 사장은 단순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오랜 시간 일을 한다고 해서 남보다 두 배의 삶을 살거나 두 배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법을 경험을 통해 서술한『아침형 인간 2』(쿠로카와 야스마사 지음)라는 책도 권한다.
이 책은 능률적인 시간 관리를 위한 하루 24시간의 효과적인 생활 패턴을 제시한다. 저자가 변호사, 공인회계사, 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시간 활용 노하우를 공개했으며, 시간 관리 전문가와 뛰어난 시간 관리 능력의 소유자들로부터 검증된 여러 가지 시간 활용 방법들을 소개했다.
독서와 함께 정 사장은 ‘몰입’에 심취해 있다. 보통 이른 아침 1-2시간동안 무아의 세계를 거쳐 창조적인 두뇌활동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시간에 중요한 결단이나 산적한 회사 현안을 처리하기 위한 큰 가닥을 잡는다. 정 사장은 보통 사람은 두뇌는 물론이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10%도 사용하지 못하지만 몰입을 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정 사장은 사색으로 시작해 몰입의 경지에 올랐다. 오래전부터 정 사장은 사색을 즐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뜨기 전 5분을 묵상으로 보냈다.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자신과의 내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중요한 현안과 관련한 단어를 떠 올리며 이런 저런 상상과 공상을 넘나들다 보면 해결책이 떠올랐다고 한다,
정 사장은 임직원에게 수시로 책에서 읽은 내용을 들려주며 독서로 이끈다. 최고경영자인 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최고교육책임자(Chief Education Officer)라고 주장하는 정 사장은 교육에 열정적인데, 책에서 발견한 내용을 강의 소재로 활용한다. 현대시절 3000번 이상의 사내교육을 담당했던 정 사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강사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강의시간을 정확하게 맞출 정도인 정 사장은 회사가 왜 이런 목표를 세웠는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CEO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단사원까지도 직접 교육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업무에 관해서도 CEO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정 사장에게 군 복무중인 병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예상과 달리 ‘인문학’이는 답이 돌아왔다. 내심 경제학자이며 CEO이기 때문에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를 소개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이유를 묻자 “병사들에게 인문학을 권하는 것은 인문학이 가진 통찰과 창조의 힘 때문입니다. 최근들어 기업과 경영자들도 효과적인 경영을 위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21세기 시장변화로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상품의 질뿐만이 아니라, 상품에 감성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생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업경영이든 자기계발이든 통찰과 창조의 힘을 얻기 위해서 인문학 도서를 두루 섭렵해야합니다.”
정 사장은 사내 그룹웨어에 ‘통통통(通通通)’이라는 CEO와의 소통 코너를 개설해 경제·경영, 자기계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CEO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임직원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장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인문학 중에서도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직접 입사 1년차부터 10년차까지 년차에 맞는 12-16권의 인문고전 목록을 선정해 책 읽기를 독려하고 있다. 인문고전은 각 년차별로 기본과정과 심화과정, 특별과정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 있다.
정 사장에게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미래사회를 위해 병사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인문학 고전 읽기’와 더불어 ‘건강’을 꼽았다. 화려한 스펙이나 학력보다 건강과 인문고전을 통해 쌓은 통찰력과 창조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월가의 살아있는 신이자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 회장)를 예로 들었다.
“빈민가를 전전하며 육체노동을 하다 다리가 부러지고, 대학생이던 여자친구로 부터 ‘이제는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와 만나고 싶어’라는 말과 함께 버림을 받은 조지 소르소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돈’ 때문이라고 여기고 금융계에 뛰어들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조지 소르소는 실패의 나날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철학고전을 읽었습니다. 퇴근하면 아예 철학서적에 묻혀 살았습니다. 조지 소르소는 자신의 투자 성공 비결을 ‘철학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 사장은 독서를 통해 ‘나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처절한 자기투쟁이 뒤따르지 않는 독서는 ‘지식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나며, 그 ‘지혜’는 ‘독서’를 통한 ‘변화’라는 의미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독서. 그 것이 바로 책 읽기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래서 정 사장은 병사들을 인문고전의 세계로 이끌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