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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우리 시대의 장인] 한식 세계화에 인생 바친 광주요 조태권 회장





한식 세계화에 인생을 바친 백발의 프론티어 광주요 조태권 회장

 

 


 

“실패를 두려워마라, 나의 도전도 여전히 현재진행형!”

 

지난 1988년 선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국내 굴지의 도자기업으로 키워낸 광주요 조태권회장은 언제부터인가 한 눈을 팔기(?)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한식의 세계화를 부르짖고,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요즈음, 그중에서도 한식 세계화의 선구자 한 사람을 들라면 크게 이의를 달지 않고 그를 손꼽는다. 이제야 사람들은 알았다! 도자기를 만들던 그가 우리 술을 만들고, 우리 음식을 내고, 전통인테리어에 뛰어들었던 이유를! 숱한 실패를 거듭했지만, 아직 도전이 멈추기 않았기에 실패와는 거리가 멀다는 조태권 회장의 결코 멈춰지지 않는 프론티어 인생.

 

 

 

김연아와 생활도자 론칭시키며 주목

 

지난 4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피겨선수권대회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13개월만에 복귀한 무대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광주요 조태권 회장도 우연히 김연아의 연기를 지켜보게 됐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많이 듣던 선율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음악 아리랑을 기본 모티브로 대한민국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담은 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태권 사장은 ‘아차,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연아의 감동적인 그 마음은 높이 살 만했지만, 적어도 세계선수권대회같은 경쟁무대에서 그 선곡이 통하기에는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아직 멀었다고 판단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김연아는 일본의 안도 미키에 밀려 2위를 차지했다. “K팝 등 이른바 한류가 확산되며, 우리가 조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내세울 만한 자리에 올랐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아닙니다. 한국이란 브랜드 파워가 아직 34위 정도니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를 알리려 한 김연아의 시도와 경기 후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연아라는 문화적 아이콘을 우리 생활도자와 접목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김연아와의 공동기획 콜라보레이션 상품으로 최근 화제를 모았던 광주요의‘YUNA 콜렉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광주요 조태권 회장은 왜 한국 문화의 브랜드 가치가 아직 멀 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과 동남아 등에 국한되어 통하던 한국의 대중문화를 이제는 미주와 유럽 등 선진국 젊은이들도 함께 즐기며 열광하고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 조 회장은 ‘문화란 여러 요소가 연결돼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만 골라 그것만 발전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음식이나 그릇 등을 세계에 팔 때도 개별 요소에 그치지 말고 우리 문화를 세트로 팔아야 한다’는 것. “문화라는 패키지가 숲이라면 김치나 비빔밥 등 개별 아이템은 묘목입니다. 치밀한 토털 패키지 전략 없이 묘목하나 나뒹구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김치를 일본문화 패키지 속에서 접하면, 김치를 먹으면서도 일본문화를 즐기는 게 되는 겁니다. 멕시코 음식 타코와 김치를 접목한 길거리음식이 뉴욕에서 대히트를 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식문화의 진출이 아니라, 김치가 다양한 멕시코 음식의 외연에 포함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지요.” 광주요를 일군 조 회장이 한식 세계화를 꿈꾸며 ‘화요’란 전통 소주를 내놓고, 초호화 한식당을 ‘가온’을 오픈시켰으며, 민화를 모티브로 한 벽지 등 인테리어 사업에 진출했던 것도 그런 철학에서 비롯됐던 것. 조 회장은 이러한 세계화의 화두를 광주요의 주요 수출국인 일본에서 얻었다. 일본은 음식과 술 · 도자기 등을 일식문화로 묶어 진작부터 세계시장을 공략했던 것.

 

 

 

지난 1988년 부친 타계하며 광주요 이끌어

 

어느 누구보다 앞서 한식 세계화를 주창한 한 사람으로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가치를 높이는데 올인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원래 그것이 조 회장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경남 남해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조 회장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복하게 지냈다. 경기중학교 2학년때 그의 부모님은 도자기 사업의 터전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역시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가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졸업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미주리대학을 다닐 때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선배의 도움으로 프랑스 식당에서 ‘버스보이’를 했다. 버스보이(busboy)는 웨이터의 심부름꾼으로 웨이터가 월급을 받으면 그 중 15% 가량을 받는 것이었다. 냅킨접기, 접시닦기 등의 일이었지만 정직과 신뢰를 인정받아 곧 웨이터로 승격했다. 이후 방학 때는 웨이터로, 개강 때는 학생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비록 고생이 됐던 시기였지만, 당시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74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우에 취직했다. 입사 후 얼마되지 않아 아프리카와 유럽 지사장에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김우중 대우회장의 특명으로 방산물자 영업을 맡기도 했다. 대우를 그만둔 뒤로는 직접 무기사업을시작, 돈도 벌만큼 벌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다가왔다. 그의 부친 故 조수호 선생은 조선 도자기 부흥을 위해 1963년 경기 이천에서 광주요를 창업,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1988년 타계하며 누군가 가업을 이어야 했던 것. “사실 제가 6형제의 막내다보니 가장 책임감 없이 인생을 살게 됐고, 그로 인해 불효를 많이 끼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도자기를 팔 곳이 일본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이것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올 터이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명맥을 유지해달라’는 어머님의 당부를 어길 수가 없었죠.

 

 

 

오늘도 나는 ‘음식보국’을 꿈꾼다!

 

글로벌 무역상으로 일하며 세계 110개 나라를 돌아다녔던 경험을 가진 조 회장은 1988년 광주요 대표를 맡으며 우리 도자기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도자기로 유명한 나라는 모두 선진국이고, 아울러 그것을 담는 음식문화도 세계적이며, 그들 상류층의 상징적 음식으로 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우리 문화의 오랜 전통을 현재화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가 공유하는 문화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

 

“20년 후 우리나라의 식품산업 규모는 1경(1만조)에 달하게 됩니다. 외식산업만 5,000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시장이죠. 이미 지난 2006년에도 식품산업 시장규모는 5,000조에 달해 자동차산업 1,320여조원과 IT산업 2,700여조원을 합한 규모보다 더 큰 시장을 형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자들은 거시경제만을 이야기해 왔지만, 사실 국민경제를 살찌우는 것은 미시경제입니다. 대기업이 매출 80%에 고용 20% 비율이라면, 중소기업은 반대로 매출 20%에 고용 80% 비율입니다. 식품외식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울 필요가 있는 거지요. 게다가 지금 중국인들의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그 중 10%만 유인해도 엄청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태권 회장이 지금까지 쏟아부은 막대한 투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한 그릇에 30만원짜리 홍계탕을 내놓기도 한 가온은 매달 2억원 이상씩 적자를 내다가 문을 닫았다. 삼성동 사옥도 매각한 상태, 지금은 양재동의 건물 한 개층을 임대해 사옥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그는 ‘실천하고 부딪치는 속에서 성공도 나오고 실패도 나온다’라고 역설한다. 실패를 절대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 자신 역시 많은 실패를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실패와는 거리다 멀다고 말한다. 오는 1월 조 회장은 자신의 한식 세계화의 철학과 제안을 담은『음식보국(가제)』이라는 단행본을 펴낸다. 경제개발시절 ‘기술보국’의 기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올라온 대한민국이 ‘음식보국’의 기치로 또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