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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파워 인터뷰] 두 번의 실패를 딛고 ‘평창의 꿈’을 이루다! : 2018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김진선 위원장

[파워 인터뷰] 두 번의 실패를 딛고 ‘평창의 꿈’을 이루다!

                          : 2018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 김진선 위원장

 

 

 

“내가 가슴에 품었던 세 가지 좌우명”

 

두 번은 절통(切痛)의 눈물을 흘렸지만, 삼수 끝에 마침내 환희(歡喜)의 눈물을 흘렸다! 2011년 대한민국을 환호케 했던 빅뉴스의 하나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였다. 동계올림픽 개최는 단지 스포츠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에 이어 국가적 위상과 브랜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하계 올림픽과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 등 4개 국제대회를 모두 개최하는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에서 6개 나라밖에 없다. 게다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는 두 번의 실패에 좌절 않고 불굴의 의지로 일궈낸 결과라 더욱 의미 깊다. 18년 동안 품어왔던 상상을 현실로 일구고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최고의 올림픽을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김진선 위원장을 월간<HIM>이 만났다.

 

글/ 유성욱 기자 사진/ 권윤성(A&A스튜디오 포토그래퍼)

 

 

 

 

마음이 일어나면 뜻이 된다! : 심지기위의(心之起爲意)

 

 

꿈꾸는 자만이 이뤄낼 수 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꿈을 갖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저절로 뜻이 되어 성취되는 일이란 없다.

 

지방자치 역사상 국내 첫 3선 도지사 역임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김진선 위원장. 그는 강원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하던 지난 1994년 열악한 강원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전략을 고민하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품게 된다.

 

그리고 지난 1999년 강원도지사로서 제4회 동계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자신감을 얻고는, 이듬해 초 동계올림픽 유치 전담기구를 설치한 뒤 그해 10월,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공식 선언한다. 당시 국내외 여론은 한마디로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평창을 평양으로 아는 해외 인사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2003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은 의외의 선전을 펼친다. 최다득표로 1차 관문을 넘어선 것.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평창은 2차 결선투표에서 캐나다 밴쿠버에 53대 56, 단 3표 차이로 아쉽게 무릎을 꿇고 만다.

 

비록 패배했지만 실망보다는 선전이라는 의미가 컸다. 이름 없는 시골마을을 전 세계에 알리며 더 큰 자신감을 얻었다. 가능성을 엿본 김 위원장은 곧바로 2014년 동계올림픽에 재도전했지만 이번에도 4년 전과 똑같은 아픔이 반복됐다. 러시아 소치의 외교력과 물량 공세에 밀려 울분을 곱씹어야 했던 것.

 

이후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김 위원장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꿈인지 생시인지 한참을 가늠해야 했다. 인생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막막함에 시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강원도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리라는 국내 여론도 있었지만 어렵게 동의를 얻어 ‘삼수’에 나섰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2010년 6월, 12년간 몸담은 도지사직에서 물러났지만 특임대사로서 혼신을 다해 유치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7월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김 위원장은 환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1차 투표에서 95표 가운데 과반수를 넘긴 63표를 획득, 독일 뮌헨과 프랑스 안시를 따돌리고 2차 투표 없이 개최권을 거머쥔 것. 모두가 예상 못했던 압도적 승리였다.

 

“정부의 지원과 강력한 국민적 지지가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한 배경입니다. 평창의 진정성과 지극정성이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죠. 사실 두 번이나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을 때 기본적으로 IOC위원들 사이에서는 부담감과 동정심이 확산돼 있었습니다. 여기에 ‘평창은 약속을 지킬 줄 알며 진정성을 갖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IOC 위원들에게 인식시키며 감격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죠.”

 

세 번의 유치전을 펼치며 ‘거버너 김(Governor Kim)’으로 통하던 김 위원장의 인맥도 IOC위원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김 위원장이 세 차례의 유치활동으로 뛴 거리는 87만6533㎞, 무려 지구를 22바퀴 돌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평창의 ‘무모한 도전’은 명확한 비전과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위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던 것.

 

그러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 위원장은 우선‘선수 중심, 경기 중심’의 대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분야에 걸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국가적으로 2018년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인 선진국에 진입하는 시기입니다. 지난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듯이 평창 동계올림픽은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는 분깃점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이 낙후되었던 강원도의 발전에도 일대 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하구요.”.

 

동계올림픽 유치 이후의 흥분에서 벗어날 즈음인 지난해 10월 19일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조직위 출범과 함께 김진선 초대 위원장의 발걸음은 다시 빨라졌다. 동계올림픽 유치는 대단한 일이지만, 사실 그 과정의 업무는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 하지만 대회 준비는 유치전과는 차원이 다른 종합프로젝트다. 우선 올 상반기중 시설, 교통, 숙박, 대회운영 등에 대한 정밀한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그 후 분야별 실행계획과 매뉴얼 마련이 이어진다. 올림픽은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열리게 된다. 세계인의 축제를 준비하는데 6년이란 준비기간이 그리 넉넉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이 생애의 단 한 번의 순간 : 일기일회(一期一會)

 

 

중학교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는 독서광 김진선 위원장은 어느 순간, 법정의 책에 심취해 그가 남긴 거의 모든 책을 섭렵했다고 한다. 일기일회(一期一會)는 법정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니다. 오늘의 나도 어제의 나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이다. 묵은 시간에 갇혀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라. 과거의 좁은 방에서 나와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살라.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일기일회(一期一會) 단 한 번의 기회, 단 한 번의 만남이다. (중략) 모든 것은 단 한 번.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라’

 

여기서 일기일회란,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또는 지금이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순간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며,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강원도 동해,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 위원장은 매순간 일기일회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온 표본이다.

 

1950년대 모두가 힘겹게 끼니를 때우던 그 시절, 김 위원장의 어머니는 지병을 앓아 자리에 누워 지냈고, 아버지는 4남매와 병든 아내를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바람에 소작농을 병행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김 위원장은 군인이 꿈이었다. 생애 첫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1․4 후퇴 당시의 잔상이라는 그는, 동네 인근에서 숙영하던 국군들이 자신을 태극기에 감싸 탱크에 올려주었던 기억을 소중히 갖고 있다. 멋있게 각인된 어릴 적 군인의 이미지는 훗날 인근 바닷가에서 해양훈련을 하던 사관생도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 구체화 됐다.

 

그래서 학창시절 김 위원장은 육사 진학을 꿈꿨다. 목표가 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학업에 힘썼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밤을 꼬박 새며 교과서를 파고든 노력까지 더해져 1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다.

 

위기의 순간도 왔다. 중학교 3학년 때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 그때 김 위원장의

잠재력을 지켜보고 있던 여선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그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준 처녀 선생님이 계셨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을 무렵, 선생님께서 우리 집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학업을 포기하지 말라며 입학금 2851원을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봉급의 절반 이상을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제자에게 준 셈입니다. 덕분에 북평고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교실 한켠에 마련된 도서실 학생 사서를 하며 책읽기의 즐거움도 익히기도 했는데 말이죠. 제게는 삶의 은인이 되어주신 분인데, 일찍 돌아가시며 훗날 찾아뵙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죄송스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진학이 목표였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에 6․3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뛰어들었다가 6개월 간 무기정학을 당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 그 일로 김 위원장은 동국대 행정학과에 다니게 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의 길을 걷다가 도지사가 되어 고향 강원도의 발전을 위해 12년을 일하게 된다. 사실 어느 길을 선택하거나, 선택되어졌더라도 김 위원장은 무엇이 되기는 되었을 것 같다. 바로 일기일회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군대 이야기만 들어보자. 김 위원장의 군 생활 3년에는 다른 이에겐 30년과 같을 이야기가 녹아 있다. 입대할 나이가 되어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자 김 위원장은‘이왕 군 생활 할 거면 확실하게 하겠다’는 마음에 해병대에 지원한다. 그러나 육사에 이어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미 육군 입영통지서가 나온 상태였기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안된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찾은 해병대에서 박대를 당한 것.

 

어쩔 수 없이 1968년에 논산훈련소로 입소했다. 대전에서 헌병병과로 근무하다, ‘한 번 하는 군 생활인데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69년 월남전에 자원해 1년 넘게 전쟁터에서 근무했던 것.

 

“십자성 부대원으로 나트랑에서 있다가 1년 만에 돌아와 보니 아버님이 폭삭 늙으셨더라구요. 아버님은 반대할 게 뻔해 형님과만 의논하고, 뒷감당은 형님께 부탁드렸는데…”

 

나머지 군 생활은 철원 6사단에서 했다. 병장 말년까지 철책선을 지키며, 분단국의 현실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 권력이 있거나, 재력을 지녔다면 군 복무를 기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시절, 물론 이왕 간 군대지만 그렇게까지 험난한 길만 찾아다닌 인물도 없을 것이다. 일기일회!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 磨斧作針(마부작침)

 

 

마부작침이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다.

 

사실 마부작침이란 비유는 ‘평창의 신화’를 설명하기 위한 만들어진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김 위원장은 종이에 ‘磨斧作針’이란 한자를 눌러쓰고는 이렇게 말했다.

 

“두 번째 실패하고 나니 이게 안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헌데 몇몇 IOC위원들이 몇 번이나 재도전을 권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꼭 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삼세번이 아니라 네 번, 다섯 번이라도 도전해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며 용기가 불끈 솟더라구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군인이 꿈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으며, 그것이 좌절되자 해병대에 지원했던 사나이, 그마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헌병병과 보직으로 군 생활을 하다가 월남전에 자원해 1년 넘게 전장에서 근무하고는, 다시 철원의 최전방 철책선을 지킨 열혈남아, 김진선 위원장은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명예회장, 해병전우회 명예회원으로서도 요즘의 병사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많다.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좌우명 말고도 또 하나가 바로 마부작침.

 

“강원도는 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자체입니다. 강원도지사를 세 번이나 하며 군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군을 원래 좋아하기도 했지만요. 그래서 군부대에 위문을 가더라도 이왕이면 심야에, 최전방이나 해안초소를 많이 찾아 젊은 병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지난 학기에는 학부 강의를 위해 1주일에 한번은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구요.”

 

여기서 잠깐! 사실 그랬다. 지난해 12년의 임기를 마치며 당시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주요 지휘관과 장병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 제2군단으로부터 열병과 분열 등 성대한 환송을 받았다. 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군의 도민화 운동’을 적극 추진하며 신망과 존경을 받았기 때문. 김 위원장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그래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만큼 요즘 젊은이들이 염려스럽지는 않더라구요. 오히려 판단력이 올바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며,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마음입니다. 그 과정에서 굳이 다른 상대와 비교해서 불평불만을 갖거나 적개심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결국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세상이 다소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측면도 있긴 하지만, 그들도 맨 처음 일구기까지의 과정은 분명 마부작침과 같았거든요.”

 

얼마 전에는 모교인 북평고를 찾아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을 위해 특강을 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김 지사가 관찰하기에도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더란 것. 바로 뚜렷한 목표와, 도전정신, 집중력 그리고 창조성이다.

 

“제가 한 가지 도전과제를 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6년 후면 평창 동계올림픽이 펼쳐집니다. 동계올림픽을 치루는 데 필요한 자원봉사자와 운영요원만 1만5천 명입니다. 각 분야의 실무를 진행할 조직위원회 요원들만 해도 1~2천 명이구요. 그때면 전역하고 난 이후가 아닙니까? 한번 목표를 갖고 준비하고 도전해볼 만하지 않은가요? 무언가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매순간 노력하고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록 평창동계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꿈꾸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신년이다. 마지막으로 김 위원장에게 지금도 자신이 맡은 곳에서 묵묵히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있을 장병들을 위한 격려의 말씀을 부탁했다.

 

“장병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추운 겨울에 근무하느라 고생이 많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그 노고를 잊지 않습니다. 자부와 긍지를 갖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건강히 군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역대 최고의 동계올림픽을 위해 저도 올 한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