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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파워 인터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시민운동의 대부, 박상증 목사

[파워 인터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시민운동의 대부, 박상증 목사

 

 

 

“스위스, 싱가포르…강소국의 중심에 군이 있더라”

 

 

경기중 재학시절 부평에 있던 일본 군수공장에서 부역중 광복을 맞은 박상증 목사는 6․25 동란 당시 부친이 납북되는 아픔을 겪는다. 서울대 문리대 재학중이던 194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한국 최고의 엘리트로 세계 교회와 연대해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했으며, 말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고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축약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온 시민운동의 대부가 주는 메시지, 그리고 인생 이야기.

 

글/ 유성욱 기자 사진/ 권윤성 A&A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외교와 안보는 중도 우측에 자리잡아야”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게 분단국가의 숙명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분단의 현실 때문에 국민개병제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신체가 건강한 이상 병역의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고…. 기자 역시 그랬다. 서울 녹번동의 자택에서 박상증 목사를 만나기 전까지다.

 

“제가 스위스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을 선포했지만 국민개병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20세부터 50세의 남자는 모두 병역의무가 있습니다. 군복과 탄약, 심지어 기관총까지 집에 두고 생활하다가, 군사훈련을 받을 때 군인이 되어 가지고 갑니다. ”

 

스위스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맥 곳곳에 방공망이 숨어 있다. 주택과 빌딩의 95%에도 지하 방공호를 갖고 있다. 200년 전인 1815년 영세중립국을 선언한 스위스는 지금까지 한 차례 외침을 받지 않았다. 철저한 군사태세가 어느 나라도 감히 작은 나라 스위스를 넘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도 9년을 살았습니다. 싱가포르 남자들도 병역의 의무를 집니다. 만 18세가 되면 군대에 가지요. 주변에 적대국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상 적을 말레이시아로 설정하고 있는데, 재미난 것은 좁은 국토로 훈련 받을 곳이 없기에 대만 등 외국 땅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해서도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거지요.”

 

싱가포르 남자들 역시 2년(고졸)에서 2년 6개월(대재) 동안 군대에 가야 한다. 현역을 마치고도 40살까지 연간 40일간 동원훈련에 소집된다. 작지만 강한 나라들은 이렇게 안보에 철저하고, 그에 따라 국민들은 국민개병제 형태로 안보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다원화 되더라도 외교와 안보는 중도에서 조금 우측에 위치를 잡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통일과 평화를 위한 노력은 물론 끊임 없이 해야하지만 그럴수록 안보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하지요.”

 

 

 

 

 

독선과 괴담의 시대, ‘소신발언’으로 눈길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무게감과 의미가 각별하다. 박상증 목사의 이력 때문이다. 박 목사는 지난 1967년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 싱가포르에 본부를 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로 일하며 1970~80년대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숨은 실세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현재는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얼핏 그를 진보적 지성인이자 운동가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성과 자유정신을 가진 개방적 사고의 소유자로 그를 바라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특히 안보 면에서 그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라 할 만하다. 의지할 나라, 가야할 군대가 없었던 시대를 살아온 그의 경험칙이 오늘날 지켜야 할 국가의 가치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게 한 것이다.

 

진보진영 가운데 ‘천안함’에 대해 소신발언을 한 일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는 지난 2010년 8월 ‘박삼증 목사가 오죽하면 친북세력 질타했겠나’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재단법인 굿 소사이어티가 ‘종교의 사회참여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마련한 대담에서 박 목사가 세속적 이슈에 대해 독선적이고 편향적인 현실인식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부 종교인들을 강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의 식사 모임에 간 적 있는데, 천안함에 대한 괴담이 난무하더라구요. 별의별 괴담이 그럴 듯 하게 포장되어 소위 지식인들의 입과 입으로 전파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한 마디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모임에 오다가 들었다. 내일 신문에 난다!’ . 모두가 귀를 쫑긋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천안함을 침몰시킨 건 알카이자다’”

서해에서의 해전도 몇차례 있었고 객관적 증거가 나왔는데도, 괴담을 늘여놓는 좌파들을 비꼰 발언이었던 것. 당시 광우병과 4대강 집회에 등장한 ‘촛불’에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 운동을 어떻게 자체 평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나는 촛불이 반미 반정부행동의 상징이 되는 것에 어떤 모순을 봅니다. 말없이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빛을 비치는 희생의 상징인 촛불이 저항과 부정의 상징이 되는 것을 두 번 봤습니다…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내가 소년기에 겪었던, 남한단독정부 부정을 앞세우며 북한정부수립을 위한 비밀선거에 동참을 강요하던 세력과 촛불시위에 비추어진 소위 선거부정의 정서에 어떤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서울대는 남로당 천하, 유학을 결심하다

 

박상증 목사의 부친 박현명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이 동해에 면한 북청은 함경도에서 사계절이 온화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북청에서는 인물이 많이 났다. 박 목사의 외가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다가 네덜란드에서 순국한 이준의 일가였다. 이준의 집안은 유명한 한학자를 여럿 배출한 북청의 명문가였던 것.

 

그곳에서 부친은 신학을 접한다. 망한 나라, 유학은 이미 쓸모없는 학문이 되었다. 무엇을 공부해서 나라에 이바지할 것인가 고민하다 예수를 접하게 된 것. 부친은 경성(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경했고, 성결교 목사가 됐다.

 

박상증 목사는 태어난 곳은 1930년 부모가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일본에서였다. 가족은 1934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일제 치하에 신음하던 세상이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아시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전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부친의 성결교는 교리를 트집잡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됐고, 부친 역시 지도자라는 이유로 투옥됐다.

 

당시 박 목사는 경기중학생이었다. 당시 가장 좋은 학교였다지만, 확전을 거듭하던 일제 치하에서였다. 어느날 담임이 그에게 ‘소년 비행병’ 입대를 권유했다. 대일본제국을 빛낼 수 있는 기회, 담임은 옥에 갇힌 아버지가 풀려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유혹했다. 하지만 부친은 아들을 사지로 보낼 수 없었다. 소년 비행병들은 가미카제, 이른바 자살폭격기에 동원되는 존재였던 것.

 

부친은 1944년 박 목사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무렵 보석으로 풀려났다. 박 목사는 공부하던 날보다 일제에 강제 부역되던 날이 더 많았다. 광복을 맞던 그해 1945년에도 부평의 무기공장에서 소총과 기관총을 만드는 일에 투입됐다. 박목사는 총신에 대검이 들어가는 부분에 구멍 뚫는 일을 배정받아, 매일 800개씩 구멍을 뚫어야 했다. 그러던 8월 15일 부역을 하던 조병창(造兵廠)에서 천황의 항복 연설을 들었다.

 

서울은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연설에 참석한 박 목사를 비롯한 학생 5,000명은 서울 치안 유지에 배치됐다. 박 목사도 뿌듯한 마음에 친구 한명과 둘이서 총알 없는 일제 99식 소총을 들고 현 역사박물관 뒤편의 파출소를 지켰다. 하지만 나라를 세울 힘과 준비가 부족했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역고, 밥을 주는 사람도 지시를 하는 사람도 없는 그 일을 1주일도 안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박 목사는 서울대 예과에 입학했다. 대학은 극심한 좌우대립의 분위기였다. 사실 좌우대립이랄 것도 없었다. 대학생 다수가 남로당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박 목사가 예과를 마치고 동숭동에 있는 문리대로 왔을 때 사상투쟁은 극에 달했다. 국립서울대, 머리글자 ‘ㄱㅅㄷ’가 ‘공산당’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동경하던 박 목사는 남로당 당원이 될 수 없었고, 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광복후 성결교 총회장으로 선출된 부친의 교회 교인들로부터도 눈총을 받았다. 서울대생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 답답한 현실, 박 목사는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49년 가을, 2차대전 때 수송선으로 썼던 7000톤급 리버티호를 타고 켄터키 주 애즈베리대학으로 향한다.

 

 

 

 

 

치열하게 살아온 80년, 남은 꿈은 국토순례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까지 공부하던 그 날 친구들에게 전쟁소식을 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주미 한국대사 앞으로 입대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주미 워싱턴대사는 장면 박사였는데, 유학생들에게 정부가 요청할 때까지 본분에 충실하라고 답장이 왔다. 유학온 지 오래돼 회화가 능통한 학생들은 한국에 파병되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지만, 박 목사는 유학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차출 대상이 아니었던 것.

 

그 해 8월 23일 부친 박현명 목사가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다. 납북 전 부친은 한강 마포나루에 제자들이 배를 탈 수 있도록 준비시킨 뒤 “너희들 먼저 가라, 나는 뛰따르마”라며 제자들의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박 목사는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애즈베리신학교를 마치고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학장 마카이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의 대가였다. 박 목사는 그 강의를 통해 에큐메니즘이 하느님의 창조 속에 전 우주가 하나가 되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에큐메니즘 안에는 평화, 공존, 생태, 협력, 사랑이 있었다. 석사학위 논문도 ‘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이해’란 주제였다. 교회일치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즘에 대한 그때의 이론적 기반은 훗날 국내 교회연합기구와 세계 교회 연합기구에서 일할 때 큰 자산이 된다.

 

10년 가까운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박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청년국 간사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7년 다시 해외생활을 시작한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연합기구인 WCC 간사가 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며 박 목사는 고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해외의 중심인물이 된다. 1973년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국제 네트워크인 민주동지회도 결성, 총무로 활동한다. WCC에서의 임무를 마치고는 다시 9년을 싱가포르에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부총무와 총무로 활동한다. 국내 민주화세력은 그가 구축한 정치적, 재정적 토양 속에 민주화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이제 조국은 이미 민주화의 궤도에 들어섰다. 1990년 가을 긴 해외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자 ‘민주화의 영웅’이 너무 많았다. 대가를 바라고 헌신했던 것은 아니었다. 권력 주변은 천성적으로 맴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박 목사는 빈털터리가 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을 맡아 정상화에 힘쓰며, 서울 갈현동 작은 건물 지하에 갈현성결교회를 개척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특이한 교회였다. 아침에 가족들이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좋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헌금이 늘어나고, 헌금이 늘어나면 교회를 크게 짓고, 큰 교회가 다시 더 많은 교인를 불러모으고…같은 식은 안중이 없었다. 나와 내 교회가 아니라 전체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그가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7년에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시민사회운동에도 뛰어든다. 민주항쟁 이후의 합법적 공간에서 국가권력 감시를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창립된 참여연대, 시민의 일상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법과 기존제도를 적극 활용해 참여민주주의를 만들어간다는 취지가 자신이 평생 해온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것.

 

공동대표를 맡으며 시한은 딱 10년으로 정했다. 공동대표로서 박 목사는 시민운동이 가야할 길에 대한 아낌없는 조언자였으며, 충돌자이기도 했다. 박 목사는 참여연대의 2000년 총선에서의 낙선운동에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네거티브 운동은 생명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2005년의 안기부 X파일도 마찬가지였다.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고 반대의견을 냈다. 비판과 반대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그의 균형감각은 참여연대가 다양한 관점과 의견의 경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9년부터는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아름다운재단의 이사장도 맡았다. 박원순 변호사가 현실 정치에 뛰어들며 재단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사옥 마련 등 굵직한 일을 마무리하고는 오는 8월 이사장직을 물러날 계획이다.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공언대로 딱 10년이 되던 2007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임했다.

 

지난 2009년 팔순연을 가진 우리 사회의 원로, 박상중 목사는 그동안 미처 몰랐던 국내 구석구석을 밟아보는 게 꿈이다. 그의 삶은 질곡 어린 한국 현대사의 축약이다. 한국으로 부임하는 미군 사령관조차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었는지 몰랐던 시대에 살았던 박 목사는 지나온 세월과 오늘의 대한민국을 응시한다. 모두가 불편해 하는 소리를 서슴지 않으며, 그는 오늘도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