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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의 지난 이야기/2011-2015

[파워 인터뷰] ‘꿈과 도전’이 ‘역경’을 이긴다는 ‘희망의 증거’ , KBS 이사장 손병두의 인생이야기

[파워 인터뷰] ‘꿈과 도전’이 ‘역경’을 이긴다는 ‘희망의 증거’ ,

                                                       KBS 이사장 손병두의 인생이야기

 

 

 

 

“고생한 게 보약, 힘들었던 게 축복이었다!”

 

어떠한 ‘역경’도 ‘꿈과 도전’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희망의 증거’가 여기에 있다. 경제계, 교육계, 언론계에 두루 큰 발자국을 남기고, 현재 KBS 이사장,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왕성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다.

 

글/ 유성욱 기자 사진/ 김중만 사진가

 

 

 

 

경제계, 교육계, 언론계에 큰 족적

 

 

서울역 맞은편 게이트타워 20층 삼성꿈장학재단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 10분 전이었다. 손병두 이사장 역시 정확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사실이지만, 바쁘게 많은 활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약속 및 시간관념에 철저하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시간관념이 오히려 느슨한 경우가 많다.

 

현재 손병두 이사장은 모두 29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어쩌면 그의 인생에 있어 다소 ‘한가한’ 시간일 수 있다. 손병두 이사장은 지난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에는 갖고 있는 직함이 대략 120여개는 됐다고 한다.

 

“저도 고생을 해봐서 잘 거절을 못합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여건이 허락하는 한 힘을 보태야지요. 그중에서도 제가 꼼짝 못하는 게 신부님이 좋은 일 하는데 필요하다는 부탁이고, 또 하나는 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일입니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의 활동은 많이 알려진 일, 그런데 장애인 재활 활동에는 또 다른 배경이 숨어 있다.

 

“외손녀가 시각장애인입니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는 건데…아직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게 없는 사회가 바로 선진국이지요. 곤지암에 있는 장애인 재활훈련 시설의 운영위원장으로서, 그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훌륭하신 ‘어른’이다. 혹시 좋은 환경에서 자라 별 어려움 없이 세상 살고, 나이 들어서는 지도층 인사답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계시구나 하고 간단 없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단지 그것만 가지고 월간<HIM>이 파워 인터뷰 대상자로 모시지는 않았을 터니 말이다.

 

물론 손병두 이사장의 프로필은 더 없이 화려하다.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와 1970년 동양방송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10년 동안 故 이병철 회장을 모셨다. 손 이사장은 삼성을 일군 고 이병철 회장에 대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이 아니라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을 보고 건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매사에 철저하고 꼼꼼한 인물로 회고한다.

 

손 이사장은 1983년 삼성그룹을 떠나 마흔세살 뒤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오르고, 돌아와서는 한국생산성본부 상무이사, 동서경제연구소 대표, 동서투자자문 대표,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 전경련 상근 부회장, 코피온 총재 등을 역임한다.

 

지난 2005년에는 신부가 아닌 경제계 출신으로서 서강대 총장에 임명돼 화제의 중심에 서며 대학가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당시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여전히 교육계와 연을 잇고 있다.

 

경제계와 교육계에 이어 언론계도 손 이사장의 활동 무대다. 동양방송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현재 KBS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손 이사장은 이에 대해 ‘대학이 벽 있는 교실’이라면 ‘방송은 벽 없는 교실’이라는 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라 이야기한다.

 

“분야가 다른 그 일들을 어떻게 다 하냐고 말하는데, 사실 모든 조직에서의 일은 근본적으로 같습니다. 조직을 분석하고 문제가 파악되면 해결법을 찾아 실천하면 되거든요. 기업이나 대학이나 또 어떤 조직이나 목표와 문화, 구성원만 다를 뿐 플랜-액션-체크-피드백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수 있지요.”

 

 

 

 

 

고학 하며 의대 합격…등록금 없어 포기 

 

 

요즘 청춘들이 다들 아프다고 한다. 보다 더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에 내던져진 청춘을 생각하면 한편에서 이해도 가지만, 손병두 이사장의 삶을 듣다보면 아픈 부위가 조금은 나을 것이다.

 

손 이사장은 1941년 경남 진양에서 가난한 농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사실 그에게는 여동생이 있을 뻔 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조산(早産)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였다. 손 이사장이 불과 아홉 살 때의 이야기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는 의사가 되어 낫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손 이사장은 의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당하기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고향에서 중학을 마치자 손 이사장은 의사의 꿈을 위해 서울로 상경, 경복고에 입학했다. 당시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진주시내에서 포목장사를 시작했지만, 사업이 실패하며 가정형편이 더욱 어렵게 됐다.

 

때문에 손 이사장은 북한산 자락의 대처승 집에서 자취를 하며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배가 고파 친구의 도시락으로 하루 끼니를 대신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공을 드렸던 밥이 산에서 내려오면, 꽁꽁 언 그 밥을 끓여서 죽으로 먹기도 했다.

 

반에서는 미술반 활동을 했다. 하지만 미술 재료를 살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그림을 한 점도 그려보지 못했다. 그 대신 살기 위해, 기필코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았던 지금의 부암동 일대에서 연탄 아궁이를 만들고 연탄을 배달하고 있는데, 마침 야외 스케치 나온 동급생들을 보게 됐다. 당시에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서너 배의 거리를 에둘러 가느라 밤새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물러야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창피한 게 많았는지…. 빨래도 세검정 시냇가에 가서 해야 했는데, 낮에는 차마 못하겠고 밤중에 가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곤 했습니다. 그 덕에 사람도 하나 구하기는 했죠. 한겨울 밤중에 빨래감을 들고 냇가에 도착했는데, 깜깜한 어둠 속 누군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던 겁니다. ”

 

고학의 어려움에도 공부에 매진했다. 지성이면 감청이라고 가톨릭의대에 합격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고향의 아버지가 빚을 냈지만,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의사의 꿈을 위해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서울대 상대 진학을 권유했다.

 

경제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의사는 한 사람을 살리지만, 경제는 여러 사람을, 국가를 살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과 출신이란 핸디캡을 극복하고 1960년 서울 상대에 입학한다.

 

자식에게 등록금을 대주는 부모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아버지는 대학 2학년때 돌아가셨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손 이사장이 도착하자 감았던 눈을 잠시 뜨게 됐던 것. 아마 등록금을 대주지 못했던 한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손 이사장이 가톨릭 세례를 받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갖게 됐다. 그때 영향을 받았던 책이 중국의 우징숑이 쓴 『동서의 피안』. 세례와 함께 모성에 대한 그리움까지 성모마리아에 의지할 수 있는 카톨릭은 그가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독서는 물론 절대자와 대면도 권하고파

 

 

손병두 이사장은 학군단(ROTC) 2기로 육군 제27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너무나 가난했고, 모든 것이 열악하기만 한 군대였다.

 

“전역 43년만인 재작년에 제가 근무했던 부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너무 잘해주고 있더라구요. 사실 옛날과 비교하면 얼마나 축복스러운 일입니까? 나라가 이만큼 커진 것이지요. 부디 군 생활을 인생의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나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손 이사장이 기억하는 군대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그릇 두 개’로 상징된다. 그 무렵은 식판이 아니라 병사들에게 그릇 두 개가 주어졌다. 하나는 밥 그릇이고, 하나는 국 그릇이다. 밥 한 공기에 국 한 그릇으로 고된 훈련을 이겨내야 했던 것.

 

“제대로 서 있는 그릇이 하나도 없었지요. 쌀 한 톨, 국 한 모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대검으로 그릇을 최대한 불룩하게 넓혀놨으니 말이죠. 보급도 열악한 데다, 그나마 부식까지 빼돌리는 일이 많아 부정을 타파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던 일이 기억납니다.”

 

소대장으로 부임하며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던 것도 잊지 못할 기억이다. 강원도 화천의 막사에는 ‘빈대’가 득실했다.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농약에 대해 좀 알았던 손 이사장은 부하들과 함께 빈대와의 처절한 전투를 펼쳐 대승을 거둔다.

 

그 다음은 ‘이’와의 전쟁이었다. (혹시 몰라 노파심에서 사족을 다는데, 빈대와 이를 모르는 병사들이 있다면 부대내 주임원사에게 물어보라! 어쩌면 소대장도 모를지 모른다) 빈대와 달리 이는 더욱 격렬히 저항했다. 잔당까지 완전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달 가까이 집요하게 내무반의 모든 옷가지와 모포를 빨고 삶는 격전을 치르고 나서였다.

 

“서울대학교 나와서 전방부대 보병으로 간 소대장은 저 말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병으로 가서 동고동락했던 체험이 내 인생의 축복입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도 그렇게 고생했던 게 다 보약이었더라구요. 어렵다고 불평하거나 낙심할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손 이사장은 군 생활을 하는 병사들이 군대에서 협동심과 인내심, 팀웍, 남을 위한 배려를 배우고 나오기를 진심으로 충고하고 희망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좋은 신체조건에 머리도 뛰어나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릴레이션십, 문제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진단. 그나마 병영생활을 통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배출되기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될 수 있었던 점에서 군대란 존재가 더욱 의미를 갖는다고.

 

요즘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 미사 이전까지 독서에 몰두한다는 손 이사장은 군 생활하는 동안 책도 열심히 읽기를 당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링컨은 어릴 적 읽은 책 4권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적 링컨이 가진 책은 4권이었죠. 어머니가 물려주신 『성경』,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천로역정』, 이웃 아주머니가 선물한 『이솝우화』, 그리고 『워싱턴 전기』였습니다. 기가 막히죠! 그 책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일깨울 수 있었고, 천국에 대한 꿈을 꾸었으며, 재치와 지혜를 배웠고, 정직함과 함께 위대한 대통령의 꿈을 가졌으니 말이죠. 한 마디에 책에 모든 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손 이사장은 군대에서 절대자와 대면하는 경험이 군 생활은 물론 인생을 살아가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한다. 어느 종교를 갖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신앙심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 손 이사장 자신의 경험담이 묻어나온 대목같아 더욱 의미깊게 들린다.

 

“제가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과는 많은 인연이 있는데,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걱정하는 것들을 요즘 많이 음미합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면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죠. ‘우리나라 사람은 부지런한데 정직하지 못하다’ ‘법을 안 지킨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라구요.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나라가 한 단계 선진국이 되기 위해 꼭 가져야 할 소셜 캐피털(사회적 자산)인 것입니다. 정직과 법, 배려…이 세 가지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하는 게 제 삶의 마지막 과제라는 생각입니다.‘

 

손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멘토’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의 ‘어른’도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서 병사들을 위한 멘토 역할까지 자임하며, 장시간 시간을 내어준 손 이사장께 병사들을 대신해 고마움을 표시한다.